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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제 목    <딸은 좋다> VS <돼지책>


엄마, 아빠를 위한 그림책

엄마라서 공감! 여자라서 공감!

《딸은 좋다》(채인선 글/김은정 그림/한울림어린이)
VS
《돼지책》(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웅진주니어)

사람들은 말했다.
“딸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을 낳으면 기차 탄다는데
딸 낳아 좋겠네.”
우리 엄마는 웃음을 지었다.

《딸은 좋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딸이 아들보다 낫다고, 딸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꼭 이 말을 곁들인다. 딸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 낳으면 기차를 탄다고.
사실 이렇게 ‘딸이 좋다’도 말하는 이면에는 딸을 낳았다고 기죽고 살았던 아픔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딸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굳이 ‘딸이 좋다’고 강조해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딸이 좋다’는 말 속에는 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의지를 밝힌다고 해서 글이 강할 필요는 없는 법! 채인선은 딸을 키우면서 누구나 느꼈던 소소한 일들을 조근조근 풀어놓는다. 예쁜 옷을 많이 입힐 수 있다거나, 엄마한테 애교를 부리는 모습, 또 때로는 작은 엄마처럼 엄마 노릇을 하는 모습을 보며,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줄 수 있기 때문에 등등. 그 가운데 가장 감동스러운 건 마지막 장면이다. 이제 뱃속의 아기를 낳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딸은 자신의 어릴 적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있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그저 딸이 좋은 이유가 아니라 딸이 ‘정말’ 좋은 이유를 듣게 된다. 그건 바로 ‘아기를 낳아 엄마가 되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딸은 좋다’며 조근조근 이야기를 늘어놓는 작가의 말에 완전히 넘어가고 만다. 사실 앞에 나온 소소한 일들이야 ‘맞아, 이런 면도 있지!’ 하는 정도의 공감일 뿐이었다. 굳이 이 책의 제목을 바꿔 ‘아들은 좋다’고 나온다고 해도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되어 볼 수 있는 것! 이건 딸만이 해볼 수 있는 일이라서, 딸이라서 정말 좋다는 말에 완전히 공감할 수밖에 없다.
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자와 같은 능력을 갖는 것, 남자랑 동등하게 맞서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여자는 늘 남자와 대립할 수밖에 없고,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몇몇 여자 말고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끝까지 버티기가 어려워진다. 더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자신이 갖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장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이는 별 의미가 없다. 이런 점에서 엄마가 되어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매력이다. 딸이 여성으로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후면 딸은 아기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딸을 낳는다면 이야기는 다시 이 책의 첫 장면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엄마가 된 딸은 자신의 딸을 안고 밖에 나갈테고, 그럼 예전의 엄마와 아기였던 딸을 보고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엄마 닮아 웃는 것도 예쁘네요.”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다 보고 덮는다고 해서 이 책은 끝나는 게 아닌 셈이다. 딸이 자라서 아기를 낳아 엄마가 되는 것처럼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세상의 딸들은 모두 다 감동스러워할만한 책이다. 비록 아들만 둔 엄마 가운데는 이 책을 마땅찮아한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지만, 적어도 엄마가 아닌 ‘딸’의 입장에서 다시 본다면 분명 다르기 보이리라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아이들보다는 엄마들이 더 좋아할만한 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이 책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을 보며 자신이 딸로 태어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모습도 봤으니까. 자신도 이렇게 커나갈테고 그래서 엄마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딸이라는 사실에 아주 만족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함정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딸이 좋은 이유만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현실에서 딸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사실 딸로 태어나 엄마가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이런 기쁨만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이런 기쁨은 잠시 잠깐 느끼는 순간의 행복일 뿐, 일상에서 훨씬 더 많은 불합리한 많은 일들을 겪어내야 할 때가 많다.

 《돼지책》은 《딸은 좋다》처럼 사진첩을 한장 한장 넘기며 행복했던 추억에 잠기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신 겉으론 행복해 보일지 모르는 한 가정에서 결코 행복하지 않은 생활을 해 나가던 엄마의 모습과 이를 해결해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첫 장면을 펼치면 멋진 집과 차를 뒤로 한채 자랑스럽게 서 있는 피곳 씨와 두 아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족인 피곳 씨의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피곳 씨의 아내는 남편과 아들의 뒷 배경 속에 있는 멋진 집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곳 씨의 아내를 만나려면 아주 멋져 보이는 이들 삼부자가 사는 집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이다.
다음 장을 넘기면 피곳 씨네 아침 식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피곳 씨의 아내는 보이질 않는다. 신문을 펼쳐들고 있어 얼굴도 안 보이는 피곳 씨는 아들들과 함께 빨리 밥을 달라고 외쳐댈 뿐이다. 피곳 부인은 그 다음에야 등장한다. 피곳 씨와 아이들이 떠난 뒤 설거지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일을 하러 나간다. 저녁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이들과 피곳 씨는 여전히 빨리 밥을 달라 외쳐대고 밥을 먹고 나선 소파에 걸터앉아 텔레비전 보는 데 몰두한다. 하지만 피곳 부인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그러고 나서 먹을 것을 조금 더 만든다.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야 하는 셈이다. 겉으로는 행복한 가정처럼 보일지 몰라도 피곳 부인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 우울한 기분은 피곳 부인의 일하는 장면만으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마치 노란색 필터를 끼고 찍은 사진처럼 보이는 피곳 부인의 일하는 모습 속에서 피곳 부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란 불가능하다. 피곳 부인은 늘 뒷모습이거나, 옆모습, 앞모습일 때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피곳 씨와 아들들이 나오는 장면이 환하고 인물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어느 날, 피곳 부인이 사라지면서 피곳 씨와 두 아들의 행복한 시간도 끝이 난다. 피곳 부인은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쪽지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이렇게 피곳 부인이 집을 떠나면서 피곳 씨와 두 아들은 더 이상 인간적인(!) 생활을 해나가기 힘들어진다. 세 사람의 인간적인 생활은 피곳 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때부터 세 사람은 돼지 같은 생활을 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 변화는 서서히 다가온다. 그리고 앤서니 브라운은 그 변화를 그림을 통해서 극대화시키고 있다. 피곳 부인이 집을 나간 뒤 처음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는 장면에선 아이 재킷의 배지만 돼지로 변했지만, 바로 옆에 피곳 씨가 돌아오는 장면에선 양복의 배지는 물론이고 문고리의 모양과 전기 스위치 모양까지도 돼지로 변한 걸 발견할 수 있다. 한 장을 넘겨 다음 장에는 피곳 부인의 쪽지가 담긴 봉투가 놓여 있는 벽난로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돼지로 바뀌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벽난로 위 그림 속에 여자의 모습은 칼로 도려낸 듯 사라지고 그 옆에는 돼지 모습을 한 남자가 총을 들고 서 있다. 그림 아래는 아기 돼지의 사진과 온갖 돼지 장식들이 보이고, 심지어 튜울립 모양의 벽지도 돼지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장면은 피곳 부인의 부재로 피곳 씨와 아들들이 돼지로 변하게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로 옆 장면에는 피곳 씨의 손으로 여겨지는, 피곳 씨의 양복과 같은 모양의 소매 끝에 사람의 손이 아닌 돼지 앞발이 보인다. 이제 피곳 씨와 두 아들 역시 돼지 모습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고 했던가! 돼지의 모습이 된 피곳 씨와 두 아들은 점점 진짜 돼지처럼 되어 간다. 겨우 겨우 먹는 문제는 해결하지만 설거지도 빨래도 하지 않아서 집은 돼지우리처럼 변하고 만다. 하지만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은 더 심술맞아진다. 창밖에 비치는 나무의 모습이 늑대 모습을 연상시키는 건 바로 어리석은 이들이 한계에 달했음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집안에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아 음식 찌꺼기라도 찾고 있을 때! 피곳 부인이 들어온다. 침침한 실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먹을 것을 찾는 이들의 모습 뒤로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을 받으며 피곳 부인의 그림자가 비치는데, 그 꼴이 피곳 부인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장을 넘기면 드디어 당당한 모습으로 그 얼굴을 드러낸 피곳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돌아와 주세요!”하며 킁킁거리고 있다.
이만하면 피곳 부인의 완승이다. 피곳 씨와 두 아들은 남자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비싼 값을 주고 치룬 셈이다. 이제 피곳 씨와 두 아들은 집안 일을 나눠서 한다. 피곳 부인도 행복하다.
사실 피곳 부인은 고민은 주부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느끼는 점일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전업 주부라 해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곤 한다. 중요한 건 직장을 다니느냐 마느냐 하는 점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과다하게 요구되는 집안 일 때문이다. 맞벌이를 할 경우 어느 정도 유예되는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집안 일의 중심은 여자에게 있고, 남편이 도와주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 처지다. 전업 주부의 경우는 집안이 곧 직장과 같아지는데, 집안 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집안 일에 치이고 만다. 또 식구들이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고 집안에서 안락함만을 즐기려 하기 때문에 더욱 고달픈 처지가 되기도 한다.
많은 엄마들이 이 책에 환호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같은 답답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피곳 부인의 행동에 박수를 쳐주고 싶고, 피곳 부인이 사라진 뒤 돼지 같은 생활을 하는 피곳 씨와 아이들을 보며 때론 고소해하기도 하고, 그러다 피곳 씨와 두 아들이 무릎을 꿇고 난 뒤에는 일종의 보상 심리 같은 걸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럼 피곳 부인은 남은 시간에 어떤 일을 할까?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는 피곳 부인이 차를 수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자동차 수리는 전통적으로 남자 일로 여겨지는 일이다. 피곳 부인이 이 일을 하는 걸 어떻게 보면 좋을까? 피곳 씨와 두 아들이 집안 일을 나눠하듯이 서로 조금씩 역할을 나눠서 해 보는 걸까, 아님 자동차 수리에 원래 관심이 있었던 걸까? 내심 피곳 부인이 좀더 자신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길 바라던 터라 차를 수리하는 장면에서 다소 당황스러워진다. 아마도 내 감성이 너무 앞섰나 보다. 무슨 일을 선택하느냐는 결국 피곳 부인의 몫인데 말이다. 피곳 부인이 선택한 일이 단순히 역할 바꾸기인지 아님 자신이 원했던 일인지는 잘 몰라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딸은 좋다》와 《돼지책》은 모두 여자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들여다 보고 싶을 땐 《딸은 좋다》를,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보고 싶을 땐 《돼지책》이 더 끌릴 듯 싶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소소한 일과 중요한 결심과 행동은 서로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면서도 중요한 순간 튀어 나갈 수 있는 결단력 또한 갖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이 글은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독서교육> 2007년 여름호 통권 25호에 실린 글입니다. 201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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