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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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제 목    [편지글] 권정생 선생님께 - <해룡이>,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를 읽고

권정생 선생님께.

 

선생님, 잘 지내시죠?

아카시아 향기가 물씬 나는 5월이에요.
혹시 선생님도 이때쯤 떠오르는 추억의 장소가 있으신가요?
전 이때쯤이면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 있어요.
중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커다란 언덕길이 있었어요. 한쪽에 산이 우거져 있고, 다른 한쪽은 절벽이었지요. 포장되지 않은 흙길은 가물 때는 먼지가 풀썩풀썩 났고, 비가 많이 오면 땅이 움푹 패어서 깊은 구덩이가 생기는 곳이었어요.
그 길로 많은 학생들이 오고갔어요. 이때쯤이면 산은 하얀 아카시아 꽃으로 물들고 꿀을 따는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벌통에서 벌이 웅웅거렸어요.
하지만 이 길은 학생들이 오고가는 시간대에만 붐빌 뿐 그 시간대를 놓치고 나면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어요. 이럴 때면 이곳은 공포의 언덕으로 변했어요. 문둥병엔 아이들 간이 최고라서 혼자 다니는 아이들이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는 말이 퍼져있었거든요.
사실 이 언덕은 아주 외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절벽 아래로는 집들도 몇 채 있었고 그 위쪽으로는 중앙대학교가 있었거든요. 또 언덕은 아래쪽으로든 위쪽으로든 벗어나기만 하면 바로 깨끗한 포장도로에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어요. 언덕은 걸어서 10분 남짓 정도의 짧은 거리였고요.
이처럼 얼마 되지 않는 그 언덕길을 공포의 언덕처럼 느껴지게 했던 그 소문의 진원지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학교에서 문둥병에 대한 공포를 더 자극했다는 사실이에요.
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확하게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아요. 하지만 학교에서 문둥병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문둥병 증세는 자기 스스로 봐서는 잘 안 보이는 곳에서 시작되고, 증세가 시작되면 그곳의 감각이 없어지고 결국 살이 뭉개져버린다며 우리보고 조심하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모든 아이들이 다 저와 같지는 않겠지만 저는 문둥병의 공포에 가끔 집에서 제 몸의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보기도 했어요. 혹시라도 감각이 없는 곳이 생겼을까 싶어서요.
그래서일까요? 언젠가 학교에서 단체로 보러 갔던 영화 벤허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 동굴 같은 곳에 따로 모여 살고 있는 장면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따로 사는 모습을 보며 문둥병에 걸리면 평생을 사람들과 떨어져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린이도서연구회에 들어가 <강아지 똥>, <몽실 언니> 다음에 읽은 선생님 작품이 《사과나무밭 달님》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해룡이>는 문둥병의 두려움에 떨던 중학교 시절 떠오르게 했지요. 해룡이가 너무 불쌍했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심정 또한 이해가 됐지요. 만약 나라도 문둥병에 걸리면 집을 떠났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 후로도 문득문득 해룡이가 집 앞에 돈과 편지를 두고 가던 모습이 떠오르곤 했어요.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 내용은 자세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해룡이의 불쌍한 처지만은 늘 가슴 짠하게 다가왔어요.
언제부턴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대체 왜 선생님은 우리에게 문둥병의 공포를 강조했을까요? 딴 데로 새지 말고 집에 곧장 가라고 그러셨을까요? 까닭은 모르겠지만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마치 죄인처럼 여기기도 했던 것 같아요. 뭔가 잘못이 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그런 느낌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정말 얼토당토않게 세뇌를 당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세상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세뇌를 시키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에서 새들이 날개를 사용하면 안 되게 된 것처럼 말이에요. 새의 정체성이란 날개에 있는 것일 텐데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물론 날개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아는 새들도 있어요. 본능적으로 날개를 움직이고 싶은 새들, 그리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아는 새들. 하지만 이를 어겼을 때 당하게 되는 벌을 무섭고 두려워해요. 이런 새들을 뭐라 할 수는 없지요. 바로 제 모습 그대로니까요. 할아버지제비처럼 하늘을 날았다가 날개가 잘린 게 된 것을 보면 이런 두려움은 더 커져요. 원래 무언가를 못하게 세뇌를 시키는 쪽은 ‘너희들, 우리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라고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극악무도 한 짓을 하니까요. 새들 가운데 일부가 아무리 반발하며 날아올라도 소용없어요. 그 새들만 잡아서 날개를 자르고 나면 나머지 새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얌전하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정답은 할아버지제비가 어린 새들에게 알려준 것처럼 모든 새들이 함께 나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에서 새들은 이 일을 해내고야 말아요. 처음엔 어린 새들이, 다음엔 청년 새들이, 그다음으로 많은 어른들과 늙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새들까지 두 날개를 훨훨 펼치며 날아올라요.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희망 가득한 이야기를 읽으며 제 마음 한편엔 부러움과 희망이, 또 다른 한편엔 이건 역시 동화라서 그렇지 현실은 다르다는 좌절감이 공존해요.
그래도 다행인 건, 희망과 용기를 새로 장착해 볼 마음이 생겼다는 점이에요. 어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어린 새들이 있으니까요.

날씨 하나는 맑고 깨끗한 5월,
투덜투덜하며 하소연하기 좋은 5월,
짧게 문안 인사만 드리려다 매번 길어지는 편지에 한숨지으며,
일곱 번째 편지글을 올립니다.

2015년 5월 5일.

오진원 올림.











 


이 글은 2015년 5월 13일 똘배아동문학회에서 주최한 권정생 8주기 추모제 발표 글입니다.
<해룡이>는 《사과나무 밭 달님》(창비)에,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는 《짱구네 고추밭 소동》에 실린 동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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