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넓어지는 옛이야기의 세계

 


뭐든지 익숙해지고 편해지면 재미가 나기 마련이다. 옛이야기도 그랬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자 옛이야기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옛이야기가 나에게 오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재미는 얼마 못 갔다. 옛이야기에 담긴 속뜻을 찾아가면서부터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는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어떤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그냥 잊어버려야지 생각하기도 했지만 잊을 수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마치 손톱 밑에 일어난 까칠한 살갗처럼 수시로 내 신경을 건드렸고, 그럴 때마다 자꾸 기억이 나곤 했다.
옛이야기 공부는 여전히 즐거웠지만 뭔가 답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은 점점 답답하고 조급해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도 신경이 쓰였다. 하긴 내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 준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때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를 때였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새끼 서 발’이었다.
게으른 총각이 하루 종일 꼰 새끼 서 발을 가지고 길을 나서는데, 그 새끼 서 발이 항아리로, 쌀 한 자루로, 죽은 당나귀로, 산 당나귀로, 죽은 처녀로, 예쁜 처녀로 바뀌게 되고, 결국 총각이 그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아이는 어느 날 그림책 ‘새끼 서 발’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기 시작하더니 이 이야기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죽은 처녀가 예쁜 처녀로 바뀌는 부분이 늘 마음에 걸렸던 터라 읽어주면서도 영 탐탁치가 않았다. 이야기에서 총각은 죽은 처녀를 마치 살아있는 처녀처럼 꾸며서 우물가에 세워놓는다. 우물가에 왔던 처녀가 죽은 처녀를 잘못 건드리면 우물에 빠지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결국 총각의 계획은 성공하고, 총각은 죽은 처녀 대신 살아있는 예쁜 처녀를 얻는다.
단순하고 착하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이 이처럼 치밀하게 일을 꾸미 걸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이는 나와는 달리 이런 부분이 걸리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저 새끼 서 발이 항아리로, 쌀 한 자루로…… 바뀌어 나가는 과정만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엄마, 식물이 죽으면 그 씨앗이 땅에 묻혀서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죽은 처녀도 산 처녀가 된 거지?”
 미처 몰랐는데, 아이도 나처럼 그 대목이 걸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생각했을 테고, 나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게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이 이야기의 수수께끼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하, 맞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죽은 처녀가 예쁜 처녀로 바뀌는 건 벼 이삭이 땅에 묻혀 새로운 알곡을 만드는 것과 같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총각이 새끼를 꼬았던 짚이란 벼를 타작하고 남은 것, 즉 죽은 것이었다. 이것이 물항아리를 거쳐서 쌀이 되고, 죽은 처녀도 물이 있는 우물가를 통해 살아있는 처녀로 바뀐다! 삶이란 죽음의 또 다른 이면이 아니던가?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끌려갔다 돌아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이야기 역시 씨앗이 땅속에서 지상으로 움터 오르는 걸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면 결국 ‘새끼 서 발’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로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해석이 100%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옛이야기를 보는 내 눈을 틔워준 것이다. 이때 아이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 아이는 자신의 한 마디가 엄마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고 나름 자신의 해석에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이가 내 옛이야기 세계를 깨우쳐 준 일은 또 있었다.
‘라푼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엄마, 마녀가 아기를 무척 갖고 싶었나 봐.”
사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라푼첼’을 보면서 마녀가 왜 아기를 빼앗아 가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밭에서 상추 좀 뜯어먹었다고 아이를 빼앗아 가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자 탑 안에 가두고 자기만 보곤 했을 리가 없다.
문득 마녀는 엄마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어졌다. 아이를 자신의 성에 가둬두고 그것이 아이를 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 엄마 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엄마들은 누구나 이런 부분이 있지 않은가.
내가 괜히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며 헤매고 놓치는 것들을 아이는 직관적으로 꿰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아이와 옛이야기를 함께 즐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 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이런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가끔 옛이야기를 하긴 해도 어렸을 때처럼 반짝이는 것은 없다.

대신 그 자리를 메워 주는 것은 함께 옛이야기를 공부하는 모임 사람들이다. 때로는 공부한답시고 모여서 자기 이야기만 한바탕 하고 모임을 마칠 때도 있지만, 그게 다 옛이야기 속 삶과 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예전엔 계획했던 공부를 못 하고 수다만 떨고 나면 조급증이 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함께 한 모임 사람들의 수다 속엔 늘 옛이야기가락이 걸쳐 있고, 그래서 한바탕 수다 속에서도 옛이야기는 새롭게 발견되곤 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구렁덩덩 신선비’의 주인공이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버리데기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옛이야기 속 바보이기 때문이다. 또 저마다 살아온 삶의 차이는 ‘구렁덩덩 신선비’ 한 가지 이야기를 볼 때도 서로 다른 지점을 향하게 한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저마다 다른 시각으로 옛이야기를 읽다보면 옛이야기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덕분에 옛이야기에 담긴 상징은 모든 사람들에게 단 하나의 의미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혼자서만 볼 때는 결코 얻지 못할 귀한 깨달음이다. 결국 옛이야기 공부를 하다 벽에 부딪칠 땐 괜히 혼자서 끙끙대며 헤매기보다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오늘도 옛이야기를 좋아하며 함께 나누는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비록 제대로 공부를 해 가지는 못해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옛이야기를 보는 새로운 눈이, 삶을 들여다보는 지혜가 더 넓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