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흐른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그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고, 맛깔 나는 이야기도 맥 빠진 이야기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 
안타깝게도 난 후자에 속한다. 분명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들을 땐 ‘나도 다음에 꼭 써먹어야지’하고 다짐을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웃긴 이야기도 그야말로 썰렁 그 자체가 되고 만다. 하는 나도 민망하고 듣는 사람도 민망해진다. 원래 이야기 하는 걸 즐기지도 않았지만 이런 좌절을 겪을 때마다 점점 더 이야기하는 걸 꺼리게 됐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도 ‘이야기 주머니’에 나오는 아이처럼 그냥 내 안에 가둬두기만 했다.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너무 부러웠다. 옛이야기를 공부를 하며 옛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면 느낄수록 타고난 이야기꾼들이 점점 더 부러웠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야기를 맛깔나게 잘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옛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어른들이 살아온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똑같은 옛이야기라도 들을 때마다 재미있었다고 했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서 이야기도 조금씩 달라졌고, 그래서 느낌도 달랐다고 했다.
아! 역시 이야기꾼들은 참으로 부러운 존재였다. 그냥 이야기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판에서 살아온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판에서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법도 체득했을 것이다.
어쩌면 난 아주 유용한 핑계거리를 찾은 셈이다. 내가 이야기를 잘 못하는 걸 다 어릴 적 이야기 한 편 듣지 못하고 자란 탓으로 돌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커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더 이상 이야기를 못한다는 핑계만 댈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릴 적 이야기를 듣지 못해 속상했던 마음을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진 않았다. 

난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이가 두 돌 무렵이었다. 나름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옛이야기는 불을 끄고 아이를 재우며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아이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뽕나무 대나무 참나무’였다. 

옛날 옛날에 뽕나무하고 대나무하고 참나무가 살았어.
그런데 하루는 뽕나무가 그만 ‘뽕!’하고 방구를 뀐 거야.
옆에 있던 대나무가
“대끼, 이놈!”
하고 야단을 치지 뭐야. 그러자 참나무가
“참아라, 참아라, 참아라!”
했대.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야기를 까먹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첫째는 내가 이야기를 할 때 늘 똑같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둘째, 아이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나름대로 끼어들며 이야기에 호응을 한다는 점이었다.
‘아하! 옛이야기판도 이랬겠구나!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졌던 거구나!’ 싶었다.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니 그제야 그동안 못 보던 옛이야기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이는 잠자리엔 들면 으레 엄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아이는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원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아이가 즐겨 들었던 이야기는 ‘재주 많은 다섯 친구’,  ‘반쪽이’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새끼 서 발’,  ‘콩중이 팥중이’,  ‘정신없는 사람’ 정도였다. 대충 어림잡아도 이야기 한 편을 수백 번은 반복해서 했다. 다른 이야기도 가끔 해주긴 했지만 특별히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아이는 옛이야기를 정말 좋아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외출을 할 때도 아이는 자리에만 앉으면 “옛이야기 해 줘.”하고 말했다. 그럼 난 조금 쑥스럽긴 했지만 아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판이란 어디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는 충분히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들을 땐 중간 중간 끼어들어 궁금한 점을 묻거나 이야기를 바꾸자고 말하기도 했다. 
‘반쪽이’ 이야기를 할 때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그런데 왜 반쪽이는 색시를 업어가면서 색시한테는 자기랑 살겠냐고 안 물어봐?”
그 다음부터는 ‘반쪽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반쪽이가 색시를 업어가면서 
“나랑 결혼해 주겠소?”
하고 묻고 색시가 
“네. 물론이지요.”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이렇게 아이의 말 한 마디가 내 옛이야기를 바꾸기도 했다. 주로 옛날엔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의 가치관과 다를 때 나타났다. 이야기란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었다. 
또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이야기를 할 때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기를 이야기 속 등장인물로 넣어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주문을 했다. 팥죽 할머니가 팥죽을 쑤면서 훌쩍훌쩍 울고 있을 때 자기가 먼저 할머니 앞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톨, 물개똥, 송곳 등이 들어오면 자기가 “넌 어디에 들어가 있어!” 하며 사건의 중심에 서고 싶어 했다. 난 기꺼이 아이의 소원대로 이야기를 바꿔줬다. 중간에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몰라서 난감할 땐 아이에게 물어보면 됐다. 그럼 아이는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다 알려줬고, 난 그대로 이야기를 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새로운 이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루는 아이가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엄마, 그런데 왜 같은 이야기인데 다 달라?”
아이 말인즉 같은 이야기라도 그림책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이야기할 때도 조금씩 다르잖아. 네가 이야기할 때도 다르고. 원래 옛이야기는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거라서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아이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울 것 같았는데 아이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자기가 몸으로 경험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이가 스스로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겠단다. ‘정신없는 사람’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다. 담뱃대를 들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팔이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내 담뱃대 어디 갔지?” “아, 여기 있었구나.”를 반복하는 그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것 같다. 한참을 깔깔대며 웃더니 다음 날 바로 자기가 그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나섰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웃겨서 한참을 웃고, 아이는 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엄마가 재미있게 듣는다 생각해 뿌듯해하며 한참을 웃었던 것 같다. 
이후 아이는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 다른 맛이 났다. 
이제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처럼 책에서 본 걸 외워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해 들려주지 않을까? 그리고 이야기판의 분위기를 전혀 몰랐던 나보다는 훨씬 더 잘하지 않을까? 내가 들려준 그대로가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로 만들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형편없는 이야기 솜씨에도 용감하게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건 역시 잘 한 일이다. 이야기란 이렇듯 세상에 나아가 많은 사람들 입을 거치면 거칠수록 강한 생명력을 갖는 법이다.